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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소설들/라노벨은 아닌데 일단 쓴 걸 정리하는 곳! 2020. 3. 15. 15:02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뺨에 그건 뭐예요?”
“멍들어서 감췄어요.”
“어디에 부딪혔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평화로운 상담실 한 구석.
하이 락이라는 이름의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준석은 자신의 상담선생님인 강록의 물음에 어색하게 웃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고 강록은 그런 준석의 말에 어색하게 웃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세상이라는 건 참 불공평하네요.”
“그런 말 하는 거 보면 하리 씨에게 맞은 모양이네요.”
“…….”
“무슨 일로 맞았나요? 말해주실 수 있나요?”
“별 거 아니에요. 언제나처럼 제가 망설이고 하리가 저를 이끌어주는 거죠.”
강록의 질문에 머리를 긁다가 한숨을 깊게 내쉬는 준석.
준석은 뺨을 만지다가 조심스럽게 뺨에 붙은 밴드를 땠고 강록은 준석의 얼굴을 보고는 작게 웃고 말았다.
“웃지 마요. 진짜 손은 되게 매워서, 씨…… 계집애가.”
“푸훕! 죄송해요. 너무 웃겨서.”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준석의 뺨.
강록은 웃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준석의 뺨에 코믹하게 남아있는 손바닥자국에 한참이나 튀어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며 차를 마셨고 준석은 그런 강록의 웃음에 얼굴을 붉히면서 그냥 웃으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냥 웃어요. 선생님.”
“크흠, 크흠! 아닙니다. 그래서 왜 싸웠나요?”
“……별 거 아니라니까요? 언제나처럼 악몽을 꿨고 바보 같은 짓을 했고 서로의 약속을 무시하는 말을 해서 하리에게 뺨을 맞은 거죠.”
준석은 머리를 긁으면서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악몽의 내용은 별 거 아니었다.
자기를 교통사고에서 구해주느라 다리를 잃은 형이 자신을 원망하는 꿈.
형과 친했던 준석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형의 다리를 빼앗아먹고도 하는 일이 남에게 술을 팔아주는 일이라며 자신을 매도했던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른 준석은 자기혐오에 빠지고 말았다.
둘 중 한 명이 다쳐야만 했다면 자신이 다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자신과 다르게 부모님의 기대를 완벽하게 부응했던 형을 떠올린 준석은 지금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강록에게 있는 대로 속마음을 그대로 말했고 강록은 준석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악몽의 내용은 언제나 똑같아요. 사고 당시의…… 형의 다리가 날아가는 그 꿈이요.”
“네.”
“그 꿈을 꾸고 나면 언제나 부모님이 저를 탓하시죠. 형이 아니라 네가 다쳤어야 했다면서 말이죠. 그리고 저는 그 말에 언제나 동의를 해요. 지금 이 순간에서도 말이에요.”
“그렇군요.”
“그래서 하리에게 나랑 있어서 행복할 거 같냐고 물어봤더니 그대로 뺨을 맞았어요.”
“그건 준석 씨 잘못인 거 알고 있죠?”
“……알고는 있어요.”
강록의 말에 머리를 긁는 준석.
서로 무언가를 해주지 않아도, 그저 같은 공간에서 같이 먹고, 자고, 쉬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거라고 믿고 동거까지 하는 사이에 그런 질문을 한 건 자신의 잘못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동시에 준석은 다른 생각을 하고 말았다.
과연 하리가 나에게 어울리는 여자인 걸까?
형의 다리를 잘라먹고서 혼자서만 멀쩡하게 사고 현장에서 도망쳐 나온 나 같은 녀석이 정작 중요할 때 하리를 구해줄 수 있을까?
아니, 분에 넘치게 구해준다, 혹은 곁에 있어준다고 말하기 전에 곁에 있어도 괜찮을 걸까?
그런 자격이 나에게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성에게 인기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준석은 PTSD에 가까운 증상으로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고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그 결과가 자랑스러운 뺨의 자국.
저절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고통스러운 충격이었지만 이 충격이 사랑이 전제가 되어 온 것을 알고 있기에 준석은 별 다른 말을 하지 못 한 채 강록의 앞에서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렇게 불안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되더라고요. 자격증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요.”
“동거 자격증이요?”
“네, 이 사람을 이 정도로 사랑하면 만나도 된다는 자격증이요.”
“아하하, 그거 편하겠네요. 하지만 밥줄이 끊길 테니 만들진 말아주세요.”
“킥킥, 밥줄 걱정부터 하시다니 세속적이네요.”
“그런가요?”
“농담이에요. 이 세상에서 돈 없이 어떻게 살아요.”
꽤 재밌는 농담이라고 생각한 준석은 한숨을 내쉬면서 강록을 바라봤고 강록은 그런 준석을 바라보면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왜 그렇게 불안해하시나요? 서로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사랑하니까요.”
“조금은 당신을 믿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준석 씨가 다른 걸 다 포기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형님에게 집착하는 바람에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잘 돌봐주잖아요? 저는 준석 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알아요.”
강록의 말에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준석.
이내 웃음기가 잦아들자 준석은 진지한 얼굴로 얼마 전, 짧게 자른 머리를 거칠게 흔들면서 강록의 눈치를 봤다.
말하기 껄끄럽다.
손님과의 대화라거나 취객을 댁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야 아무래도 쉽게 할 수 있지만 이건…… 아무래도 힘들다.
그렇게 생각한 준석은 강록이 웃는 얼굴 그대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자 한숨을 내쉬면서 말하기 껄끄러웠던 걸 그대로 입 밖으로 토해냈다.
“하지만, 제가 좋은 사람인 것과 그런 자격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좋은 사람인 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그런가요?”
“그렇죠?”
잔에 담겨있는 물을 홀짝거리고 힘든 것을 감추기 위해서 멋쩍게 웃어 보이는 준석.
이내 준석은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사람과 다른 사람과, 하리와 동거할 떄 자신감 있게 있을 수 있는 조건을 말해주었다.
“강한 사람, 이라고 말하면 어떤 사람이 떠올라요?”
“네? 강한 사람이요?”
“네. 강한 사람. 힘이 강한 사람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힘이 강한 사람일수도 있죠. 재력이 강한 사람도 있을 거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자아가 강한 사람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그런 게 다 강하다고 해서 강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명백하게 떠오르진 않잖아요?”
“으음…… 확실히 그러네요. 비슷하면서도 다르네요.”
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강록.
확실히 강한 사람이라는 건 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준석의 말대로 힘이 강한 사람도 강한 사람이고 반대로 그렇게 될 때까지 수많은 노력을 기꺼이 감내하는 사람도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연약하고 의지가 약하더라도 강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려보라고 한다면 너무나 쉽게 이미지가 떠올랐고 그 순간부터 강록의 안에서 강하다는 이미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전체를 꿰뚫는 무언가가 있지만 명백하게 그걸 집어서 말하지 못하는 상황.
강록은 준석에게 있어서 착하다는 것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준석을 바라봤고 준석은 강록이 원하던 대로 자신이 말하는 좋은 사람에 대한 것을 말해주었다.
“좋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저를 학대했던 가족과도 화해한 채 지내도, 남을 배려하고 남을 신경 쓰는 것도, 사소한 일로 싸우지 않는 것도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저는 왠지 그 관통하는 무언가가 없는 느낌이에요.”
“하지만 그 무언가가 정확하게는 모르잖아요? 그럼 그저 준석 씨가 불안한 거 아닐까요?”
“그럴지도요, 하지만 아시잖아요? 사람이라는 건 정확한 무언가가 없으면 언제나 불안하고 틀려도 정확한 무언가를 찾으려고 한다는 거. 저에게 있어서 그게 자격증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군요.”
준석의 말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강록.
꽤나 흔한 일이다.
대인관계는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리고 언제나 변화되고 고정되어있지 않으니 사람들은 확실한 무언가를 원한다.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정도로 서로를 믿고 사랑하고 존중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 커플들도 커플반지라거나 목걸이를 가지는 게 그 예시.
그렇기에 강록은 누구나 다 그런 고민을 한다면서 준석을 바라봤고 준석은 머리를 긁으면서 부끄러운 얼굴을 했다.
“그런 사람들은 많으니까 확실히 자격증 같은 게 있으면 편하겠네요.”
“아하하…….”
“하지만 그런 자격증이 있으면 불안해하지 않을까요?”
“네?”
“제 생각에는 연애 허락 자격증, 결혼 허락 자격증, 육아 허락 자격증 같은 게 있어서 준석 씨가 그걸 전부 취득하더라도 준석 씨는 무언가가 불안해서 여기에서 자격증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투덜거렸을 걸요?”
“……풉, 확실히 그건 그러네요.”
강록의 말에 멍하니 강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트리는 준석.
지금도 물질적 증거라거나 명백하게 보이는, 변하지 않는 증거 같은 건 여러 개나 있다.
그럼에도 자신은 자신이 하리와 안 어울린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서 또 다시 증거를 원하고 있다.
아마도 자격증이 생기더라도 똑같겠지.
그런 생각에 준석은 한참을 웃다가 진정하고는 책상에 엎드리고는 강록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거렸고 강록은 그런 준석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준석이 무슨 말을 하나 기다렸다.
“어쩌면 그런 게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더 원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럴 수 있겠네요. 불안한 건 견디기 어려우니까요.”
“이제까지 잘 해왔으니까 괜찮다……라고 믿기에는 하리가 너무 좋아요. 너무 사랑해요. 그래서 불안하네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지금처럼요. 지금처럼 지내고, 지금처럼 가끔 싸우고, 화해하고 놀러 가면 적당히 괜찮을 거예요.”
“적당히예요?”
“네, 무리하면 결국 오래가지 못 할 테니까요. 힘들어하지 않고 힘을 조금 빼는 편이 좋아요. 준석 씨. 적당히 불안해하고 적당히 안심하고…… 그렇게 하리 씨의 곁에 있어주세요. 불안을 즐기고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리광도 불이고, 집착도 하고 그러세요.”
“그거 상담사가 할 말이 아니지 않아요?”
“후후, 뭐든 적당한 건 괜찮답니다. 저는 준석 씨가 일상생활을 힘들어하는 부분이 있어서 도와줄 뿐인 사람인 걸요.”
적당히라면 애인에 대한 집착도, 어리광도, 뭐든 괜찮다고 말하는 강록.
준석은 그런 강록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강록은 그런 준석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럼 가볼게요. 선생님.”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준석 씨.”
뭐든 적당히라면 괜찮은 거구나.
그 적당히가 어려운 일이지만 그건 노력해야만 하는 일이겠지.
상담실의 문을 열면서 생각에 빠지는 준석.
하지만 대기실에서 하리가 화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준석은 뺨을 오른손으로 가리며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고 하리는 그런 준석을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할 말 없어?”
“……어, 음, 잘못했습니다.”
“치킨.”
“그래, 살게. 난 뼈 있는 치킨이 좋은데…….”
“씁!”
“뼈 없는 게 좋죠. 처리하기도 쉽고.”
“음료수는?”
“스파클링 에이드로 사드리겠습니다. 공주님.”
“흥! 이번만 봐주는 거야. 다음에 또 그런 소리하면 다시 뺨따귀 쳐맞을 줄 알아.”
“네, 네.”
일부러 화난 척을 하지만 슬픈 게 티가 나는 하리의 모습.
준석은 그런 하리의 모습에 일부러 장난기 넘치는 말을 하면서 상담실을 나섰고 하리가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자 환하게 웃으면서 거리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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